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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소식

십승지 중 일승지[풍기읍 금계리]

십승지(十勝地)란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전염병, 전쟁, 흉년 세 가지 재앙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을 말한다.

 

그중에서 첫째로 꼽히는 풍기읍 금계에 대하여 중앙일보에 자세히 나온 글을 소개한다.

 

 

영주시 풍기 금계동

미래의 땅 - 십승지를 가다/중앙일보/1998.4.30


소백산 천문대 남쪽, 경북 영주 (榮州) 시풍기 (豊基) 읍 삼가리 한 언덕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는 金유홍 (47) 씨 - .그는 서슴없이 집안 내력을 털어놨다.

"원래 선대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셨다. 1백30년전에 비결을 보고 이곳으로 오셨다. 현재 4대째 이곳에 산다. 아버님께서 이사 나가면 굶어 죽는다고 하셨다.

 

 

金씨는 비결의 진의는 잘 모르지만 "굳이 아버님의 말씀을 어기기 싫어 지금껏 이곳에서 산다" 고 했다. 또 금계동의 황영욱 (61) 씨는 조부의 고향이 평양이라고 했다. 달밭골에 사는 김만정 (50) 씨 역시 해방되던 해에 조부가 황해도 곡산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풍기 사람들은 풍기를 두고 '작은 서울' 이라고 한다. 이곳 토박이보다 전국 각처에서 비결의 가르침을 좇아 모여든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풍기의 토산품인 인삼과 직조물은 이렇게 모여든 외지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명성을 얻고 있다.

과연 비결서는 풍기를 두고 뭐라 했는가.정감록의 감결은 풍기 차암 (車岩) 금계촌 (金鷄村) 이 십승지의 첫번째라고 꼽았다.

남사고의 십승지론에도 피란지로서는 소백산이 으뜸이라고 했다.

이후 여러 비결서들은 이 두 이론을 확대.재생산해 내는데 불과했다.

풍기에 모여든 비결파들은 금계동의 위치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다음의 원칙에는 수긍한다.

첫째는 돌이 없어야 한다. 둘째는 바람이 없어야 한다. 셋째는 죽령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세가지는 모두 죽령과 관계있는 조건들이다.

서울과 통하는 영남대로의 높은 죽령을 옆에 끼고 있는 풍기는 자연히 바람이 세고 개천 (남원천)에는 돌이 많게 마련이다.

그리고 죽령이 보인다면 곧 큰길과 인접해 있다는 뜻이다.

이 세가지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현재 금계동으로 불리는 임실 (任實)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 는 금계포란형에서 비롯됐다.

임실은 임신 (妊娠) 과 통한다. 그런 점에서 더욱 임실이 유력한 십승지로 꼽힌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지역에는 닭의 벼슬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2개 있다. 암수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세다.

이 봉우리는 욱금동과 금계동의 경계가 되고 있다.

사진

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의 석조 아미타불 좌상. 통일신라 말기 작품. 습기 방지를 위해 금칠을 했다.

 그래서 서로 자신의 동네가 금계촌이라고 다툰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면 전란과 질병,가뭄이나 홍수, 굶주림의 피해가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비로사의 성공스님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비로사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전쟁, 한국전쟁을 통해 완전히 불타버렸다" 고 했다.

비로사는 임실이나 욱금동보다 산속에 위치한다. 그런데도 전란의 참화를 겪었다. 앞서 김유홍씨도 "부친이 6.25때 고생했다" 고 말했다.

지난 60, 70년대 풍기는 영풍군 (현재 영주시)에서 가장 부유한 읍면이었다. 인삼과 직조업의 번성으로 군의 재정을 풍기가 맡았다. 그러나 이젠 영주시가 더 커졌다.

풍기는 영주시의 배후에 있는 전원도시로 변했다. 중앙고속국도가 개통되는 2000년대 초에는 죽령마저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풍기는 세상에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아야 한다. 아마 십승지 제1의 영예는 이때쯤 전설 속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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